

아타리 2600
아타리 2600은 1977년 9월 11일에 북미 시장에 출시된 거치형 게임기이다. 그 당시에는 아타리 2600이 아닌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Atari Video Computer System, 줄여서 VCS)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으나 1982년 11월 아타리 5200을 출시하면서 아타리 2600으로 개명했다.
당시 사람들이 오락실에서 볼 수 있던 브레이크아웃, 스페이스 인베이더, 팩맨 등의 아케이드 게임들을 집에서 할 수 있다는 점에 큰 인기를 자랑했다. 당시 판매 가격은 199달러였으며, 롬팩의 가격은 대체로 25달러였다. 당시의 물가를 고려하면 결코 저렴한 가격이 아니지만,[1] 1981년까지 큰 성공을 거두어 당해년도에만 11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렸다.
아타리 쇼크가 1983~1985년도에 일어났고 이후 닌텐도가 패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타리/시어스에서 1985년, 서드파티의 1986년을 제외하고는 1989년까지(유럽은 1990년까지)도 적은 숫자이지만 게임이 꾸준히 발매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장장 13년 동안 지원 된 셈으로 이는 플레이스테이션 2와 타이 기록이다. 또한 홈브루 게임은 2018년에도 나올 정도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92년 1월 1일 아타리에서 모든 8비트 컴퓨터와 게임 기종들을 한꺼번에 단종했을 때 같이 단종되었고, 이 때까지 3천만 대 이상 팔려 나갔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대략 7백만 장 정도 팔려 나간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 팩맨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전자기기(gadget) 중 하나에도 포함되었다.
홍콩에서도 1982년 당시 왕씨전자의 계열사 항건무역주식회사(Kong King Trading Co. Ltd)에서 발매했다.
1977년 출시 이후 당장의 아타리 2600 판매량은 부진했다. 놀런 부슈널은 빠른 기술 발전에 반해 뒤쳐진 아타리 2600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후속 게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놀런 부슈널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가 갈등하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도 아타리의 엔지니어들은 CTIA와 ANTIC 그래픽 칩과 POKEY 오디오 칩등 차세대 게임기 시스템을 위한 칩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1978년 2월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서는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 대학교 출신이면서, 당시 굴지의 섬유회사였던 벌링턴 인더스트리 부사장을 역임했던 레이몬드 카사르(Raymond Edward Kassar)[3]를 마케팅 부사장으로 고용할 것을 추천했고, 놀런 부슈널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타리에 들어온 레이몬드는 자유분방한 사내 문화가 경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걸 파악하면서도 게임기 자체의 성공 잠재력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놀런 부슈널은 이후로도 워너 임원진에게 이미 게임기 시장은 망했으니 빨리 재고를 처분해야 한다는 등 부정적인 발언을 쏟아 놓았고 결국 같은 해 자신이 아타리 내에서 운영하고 있었던 피자 가게 프랜차이즈의 권리와 더불어 게임기 매출의 일부를 배당으로 받는 조건으로 같은 해 11월 아타리를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아타리의 CEO가 된 레이몬드 카사르는 500만 달러를 투자해 1978년 연말 시즌을 노려 그 해 4분기 내내 "Don't Watch It, Play It"이라는 구호로 전례없는 TV 광고 공세를 한 결과, 그 해에만 2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릴 수 있었다. 결국 레이몬드 카사르 때문에 놀런 부슈널의 주장이 틀리게 된 것이다.
이후 레이몬드 카사르는 당시 사내 문화가 자유롭다 못해 개판 5분 전이었던 아타리의 체계를 잡아나갔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아타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또한 레이몬드 카사르가 수많은 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하면서 많은 엔지니어들도 역시 코모도어, 발리, 마텔 및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으로 떠났다. 하지만 아타리는 1981년까지 급속히 성장하면서 떠난 사람보다 입사한 사람이 더 많았고, 대기업이 되어 갔다.
1980년 타이토와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북미 가정용 시장 독점 계약을 맺고 아타리 2600에 이식해 출시한 이후 게임기의 판매량은 4배로 증가했다. 급속도로 성장해 1981년에는 무려 11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렸다.[4]
이렇게 잘 나가던 아타리 2600은 1982년 연말부터 아타리 쇼크를 맞이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이 사건으로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아타리의 게임기 사업부를 1984년 7월 3일, 잭 트러멜에게 2억 4천만 달러에 매각했고, 이후 아타리의 종업원들을 잭 트러멜이 대규모로 해고했으며, 아타리 2600은 잭 트러멜이 중점적으로 밀던 아타리 8비트 컴퓨터 시리즈와 아타리 ST에 밀려 핵심 사업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86년 "The Fun is Back"과 50달러 미만이라는 구호로 후술할 아타리 2600 주니어를 출시하면서 생명을 연장했다. 그러다가 1992년 1월 1일 아타리 8비트 컴퓨터 시리즈와 아타리 7800, 아타리 XEGS와 함께 일괄 단종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Highland Dynamics가 발행한 2004 Video Game Price Guide에 따르면 단종할 때까지 아타리 2600 시리즈는 약 3천만 대 이상 팔려나갔다고 추산했다.
아타리 2600 플러스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대를 연 아타리 2600이 돌아왔다. 지난 1977년 출시된 이후 46년 만이다. 8월 23일(현지시간) IT 매체 더 버지(The Verge)에 따르면 아타리가 아타리 2600의 후속작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후속작의 이름은 ‘아타리 2600 플러스’다. 아타리 2600 플러스는 원작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복각판이다. 기존 디자인은 물론 사용 방법까지 똑같이 구현했지만, 주변 기기와 연결성을 개선한 게 특징이다.
앞서 언급했듯 외형은 원조 아타리 2600 디자인을 그대로 계승했다. 아타리 2600은 오래전 출시된 기기답게 전면에 목재 패널을 넣었다. 아타리 2600 플러스 역시 같은 자리에 목재 패널을 부착했다. 상단 중앙에 위치한 카트리지 삽입구, 그 주변에 배치된 4개의 토글형 스위치까지 원본 디자인을 전부 살렸다.
달라진 점도 적지 않다. 먼저 전체적인 크기가 줄었다. 크기는 원작의 80% 정도다. 카트리지가 잘 빠지도록 삽입구 설계도 개선했다고 한다. 외부 출력 디스플레이 연결용 HDMI 단자가 추가됐으며, 와이드 스크린 모드도 지원한다. 기존에 있던 컨트롤러 연결 아날로그 단자는 그대로 유지했다.
원작과 호환성에도 신경 썼다. 아타리 2600, 아타리 7800용 게임 카트리지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혹여 보관해둔 구형 카트리지가 있다면, 아타리 2600 플러스로 구동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컨트롤러도 호환된다. 아타리 2600 플러스용 컨트롤러 CX 40 플러스를 오래된 아타리 콘솔에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다.
고사양 게임을 구동하는 콘솔이 아니기에 성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저사양 전자 제품에나 쓰이는 록칩(RockChip) 3128 프로세서를 탑재했다. 메모리 용량과 저장 공간은 각각 256MB에 불과하다. 메모리는 구형 DDR3 램(RAM)을 사용한다.
구성품은 조촐한 편이다. 본체, 컨트롤러 1개, 10 in 1 카트리지, 연결 케이블 정도다. 10 in 1 카트리지란, 10개의 게임을 하나의 카트리지에 담았다는 의미다.
마이크로소프트(MS) 엑스박스,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스위치 등 현재는 가정용 콘솔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게임을 하려면 오락실을 찾아야 했다. 밖에서나 즐길 수 있던 게임을 가정으로 가져온 업체가 바로 아타리다. 아타리는 가정용 게임기 퐁을 시작으로 1977년 아타리 2600을 출시해, 콘솔 게임기 시대를 열었다.
아타리 2600은 출시 첫 해 25만대, 이듬해 50만대가 팔렸다. 이후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1979년 크리스마스에만 100만대가 팔렸고, 1982년에는 800만대를 기록했다. 출시부터 1984년까지 총 3000만대가 판매됐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타리가 저품질 게임을 마구잡이로 출시하면서, 몰락이 시작됐다. 1982년 출시된 이티(ET)는 당시 아타리의 행태를 잘 보여준다. 이티는 조악한 그래픽과 조작성으로 게임으로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에 150만대 중 100만대가 반품됐다. 아타리는 350만개의 이티 재고를 떠안게 됐다.
아타리는 이티 재고를 처리할 방법이 마땅치 않자, 미국 뉴멕스코주 사막에 전부 매립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타리는 크게 기울었으며, 여파로 콘솔 업계도 크게 흔들렸다. 이 사건이 유명한 ‘아타리 쇼크’다. 즉 아타리 2600은 아타리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기기다. 복각판 아타리 2600 플러스가 큰 관심을 받는 이유다. 새 아타리 콘솔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지 주목된다.
레디플레이어 원 등장
영화 속 악역인 놀런 소렌토의 이름은 아타리의 창업자 놀런 부시넬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2월 그는 게임사에 남긴 업적을 인정받아 게임 개발자 초이스 어워드 혁신가상에 이름을 올렸지만 과거 직장 내 성희롱 행동이 폭로됨에 따라 수상이 취소됐다.
* 추가 패드 도 주문 했지만 같이 안 와서 번들 셋트 만 먼저 올립니다